노루즈가 불태우는 것: 봄의 축제가 이란 체제에 던지는 질문
매년 3월 21일, 이란을 비롯한 중동·중앙아시아 수억 명이 노루즈(새해)를 맞이한다. 하지만 이 고대 축제는 단순한 봄맞이가 아니라, 이슬람 공화국 체제와 페르시아 정체성 사이의 오랜 긴장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불꽃 너머로 새해가 온다
오늘, 3월 21일. 테헤란의 골목에서, 카불의 광장에서, 이스탄불의 쿠르드 마을에서, 그리고 로스앤젤레스의 이란 교민 거리에서 사람들이 불을 뛰어넘는다. "차르샨베 수리"의 불꽃이 채 식기도 전에 노루즈(Nowruz), 즉 페르시아 새해가 밝았다. 3,000년 넘게 이어진 이 봄의 축제는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그런데 이란 이슬람 공화국 정부는 이 축제를 대체 어떻게 바라볼까?
조로아스터교의 불꽃, 이슬람 공화국의 딜레마
노루즈의 뿌리는 이슬람 이전 시대, 조로아스터교의 세계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춘분에 맞춰 어둠과 빛이 균형을 이루는 순간을 새해의 시작으로 삼은 이 전통은 아케메네스 왕조, 사산 왕조를 거치며 페르시아 문명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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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호메이니 정권은 노루즈를 "이슬람 이전의 이교적 풍습"이라며 노골적으로 탄압했다. 국영 방송에서 축하 프로그램이 사라졌고, 불 뛰어넘기 행사는 위험하다는 명목으로 금지 시도가 이어졌다. 하지만 수천 년의 관성은 꺾이지 않았다. 이란 국민들은 정권의 눈치를 보면서도 집집마다 하프트신(Haft-sin) 상을 차리고, 거리에서 불을 피웠다.
결국 정권도 타협했다. 오늘날 이란 정부는 노루즈를 공식 국경일로 인정하되, 조로아스터교적 기원보다는 "이란 민족의 전통"으로 재해석하는 방식을 택했다. 일종의 문화적 협상인 셈이다.
2026년, 노루즈가 더 뜨거운 이유
올해 노루즈는 유달리 복잡한 배경 위에 놓여 있다. 2022년 "마흐사 아미니" 시위 이후 이란 사회의 균열은 봉합되지 않았고, 경제 제재로 인한 물가 폭등은 서민들의 새해 준비를 짓누르고 있다. 하프트신 상에 올려야 할 사과(sib)와 마늘(sir) 가격조차 부담스러운 가정이 늘었다는 현지 보도가 잇따른다.
그럼에도 테헤란 시민들은 불을 뛰어넘으며 외친다. "Zardi-ye man az to, Sorkhi-ye to az man(내 노란빛은 네게, 네 붉은빛은 내게)." 불에 병을 넘기고 생기를 받아오겠다는 주문이다. 체제에 대한 저항인지, 삶에 대한 의지인지, 아마 둘 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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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루즈는 이란만의 것이 아니다. 아프가니스탄, 아제르바이잔, 타지키스탄, 이라크 북부의 쿠르드족, 터키 동부까지 수억 명이 같은 날 새해를 맞는다. 유네스코는 2009년 노루즈를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봄은 국경을 모른다.
🎬 영화·드라마 속 중동
이란의 문화적 긴장을 가장 생생하게 담아낸 작품은 단연 마르잔 사트라피의 자전적 애니메이션 **《페르세폴리스》(2007)**다. 혁명 전후 테헤란 소녀의 눈으로 본 이란은, 노루즈 같은 일상 문화가 정치와 얼마나 깊이 얽혀 있는지를 섬세하게 보여준다. 물론 일부 장면은 극적 과장이 있지만, 이란 중산층 가정의 정서는 놀랍도록 사실적이다.
**《언더 더 섀도우》(2016)**는 이란-이라크 전쟁 시기 테헤란 아파트를 배경으로 한 공포 영화다. 전쟁과 억압의 공포를 초자연적 존재로 형상화했는데, 이란 당국의 검열을 피해 요르단에서 촬영한 사실 자체가 이란 창작 환경의 현실을 말해준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택시》(2015)**는 금지된 감독이 몰래 찍은 테헤란 일상의 기록이다. 노루즈 축제처럼, 억눌린 것들은 결국 틈새를 비집고 나온다는 걸 이 영화는 조용히 증명한다.
불은 꺼지지 않는다
노루즈의 불꽃은 3,000년을 살아남았다. 제국의 흥망도, 종교 혁명도, 경제 제재도 그 불을 완전히 끄지 못했다. 어쩌면 그것이 이 축제가 오늘도 정치적인 이유일 것이다. 새해 첫날, 불을 뛰어넘는 이란인들의 발끝에는 과거를 털고 다시 시작하겠다는, 아주 오래되고 아주 인간적인 의지가 담겨 있다.
노루즈 무바라크(Nowruz Mubarak). 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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