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가 살아남은 건, 다시 사랑하기 위해서였어요" — 홀로코스트 생존자에서 미국의 어머니가 된 여인, 거다 바이스만 클라인 이야기
나치 수용소 여섯 곳을 거치며 가족 모두를 잃은 체코 소녀 거다 바이스만은, 해방 후 미국에 정착하여 반세기 넘게 학교를 돌며 증오 대신 사랑을 가르쳤습니다. 그녀가 수용소에서 간직한 한 줌의 소금과 한 장의 사진, 그리고 마지막 남은 오빠와의 재회는 미국 전역을 울린 기적의 이야기입니다.
들어가며: "증오에 쓸 시간은 제게 없습니다"
거다 바이스만 클라인(Gerda Weissmann Klein)은 2022년 4월 3일, 9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 중 하나는 이것이었습니다.
"증오는 제가 감당할 수 없는 사치입니다. 제가 살아남은 건 다시 사랑하기 위해서였어요."
그 말의 무게를 이해하려면, 1939년 폴란드 비엘스코(Bielsko)로 돌아가야 합니다.
1. 빼앗긴 열다섯 살의 봄
1924년 폴란드(당시 체코슬로바키아 국경 인근)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거다는 행복한 소녀 시절을 보냈습니다. 아버지 율리우스, 어머니 헬레네, 오빠 아르투르 — 네 식구는 서로의 전부였습니다.
1939년 9월,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며 모든 것이 무너졌습니다. 열다섯 살 거다의 마지막 평범한 아침, 아버지는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무엇이 일어나든, 절대 네 신발을 벗지 마라. 신발이 없으면 걸을 수 없고, 걸을 수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이 한마디가 그녀의 목숨을 살릴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2. 여섯 곳의 수용소, 3년의 죽음의 행군
거다의 가족은 하나씩 끌려갔습니다. 오빠 아르투르는 먼저 이송되었고, 아버지와 어머니도 각각 아우슈비츠로 보내져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거다 자신은 1942년부터 1945년까지 볼켄도르프, 마르츠도르프, 란트슈프트, 헬름브레히츠 등 여섯 곳의 강제 노동 수용소를 전전했습니다.
1945년 1월, 전쟁이 끝나가자 나치는 증거를 없애기 위해 수감자들을 이동시켰습니다. **"죽음의 행군(Death March)"**이 시작되었습니다. 영하의 겨울, 2,000명의 여성 수감자들이 350마일(약 560km)을 걸었습니다. 도착했을 때 살아남은 사람은 겨우 120명이었습니다.
거다는 아버지의 말을 기억했습니다. 그녀는 끝까지 신발을 지켰습니다. 혹한 속에서 동상에 걸린 발이 신발 안에서 부풀어 올랐지만, 벗지 않았습니다. 신발은 곧 삶이었습니다.
3. 해방의 순간 — 그리고 커트 클라인이라는 이름
1945년 5월 7일, 체코 볼라리(Volary) 근처의 한 버려진 공장에서 거다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체중은 30킬로그램도 되지 않았고, 머리카락은 모두 하얗게 세어 있었습니다. 스물한 살이었지만, 일흔 노인처럼 보였습니다.
그때 문이 열렸습니다. 미 육군 제5보병사단 소속의 한 젊은 중위가 들어왔습니다. 그의 이름은 커트 클라인(Kurt Klein). 독일 태생의 유대계 미국인으로, 나치를 피해 1937년 미국으로 건너온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미국 비자를 받지 못해 아우슈비츠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커트는 공장 안에 쓰러져 있는 여성들을 보았습니다. 거다는 마지막 힘을 다해 일어서며 말했습니다.
"우리는… 유대인입니다."
커트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대답했습니다.
"나도 유대인입니다."
그 순간, 거다는 나중에 이렇게 회상합니다:
"그가 나를 위해 문을 열어주었어요. 3년 만에 처음으로, 누군가가 나를 인간으로 대해주었습니다."
문을 열어주는 그 작은 행위 — 일상에서는 아무 의미 없는 예의 — 가 3년간의 비인간적 삶을 관통하는 빛이 되었습니다.
4. 미국에서의 새 삶 — 증오 대신 사랑을 가르치다
거다는 회복 후 1946년 커트 클라인과 결혼하여 미국 뉴욕 주 버팔로에 정착했습니다. 이후 애리조나 주 스코츠데일로 이사하며 미국 시민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경험을 1957년 회고록 **『All But My Life(내 삶을 제외한 모든 것)』**으로 출간했습니다. 이 책은 60년 넘게 절판되지 않고 읽히며, 미국 고등학교와 대학교의 필독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거다의 진정한 유산은 책이 아니라 발걸음이었습니다. 그녀는 50년 넘게 미국 전역의 학교, 교회, 지역 사회를 직접 방문하며 학생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수천 번의 강연에서 그녀는 한 번도 "나치를 미워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사람의 친절이, 천 명의 잔인함을 이길 수 있습니다."
5. 오빠와의 기적적 재회
전쟁이 끝난 후, 거다는 가족 중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1945년 말,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오빠 아르투르 바이스만이 살아 있었습니다. 그는 러시아를 거쳐 터키로 탈출했고, 이후 이스라엘(당시 팔레스타인)에 정착해 있었습니다.
수년간의 수소문 끝에 남매는 재회했습니다. 거다는 그 순간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오빠를 안았을 때, 나는 아버지의 팔과 어머니의 눈을 동시에 느꼈습니다. 우리 가족은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었어요."
6. 아카데미상, 그리고 대통령 자유 훈장
2004년 감독 킴벌리 메이스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One Survivor Remembers(한 생존자의 기억)』**는 거다의 이야기를 담아 아카데미상 단편 다큐멘터리 부문을 수상했습니다.
2011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거다 바이스만 클라인에게 미국 민간인에게 수여할 수 있는 최고 훈장인 **대통령 자유 훈장(Presidential Medal of Freedom)**을 수여하며 말했습니다:
"거다는 우리에게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어두운 곳에서도 빛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7. 마지막까지 — "내가 해야 할 일이 하나 남았어요"
남편 커트 클라인은 2002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56년의 결혼 생활이었습니다. 거다는 남편의 죽음 이후에도 강연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90대에도 휠체어에 앉아 학생들 앞에 선 거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한 젊은 군인이 나를 위해 문을 열어주었을 때, 그가 세상을 바꾸었으니까요."
2022년 4월 3일, 거다 바이스만 클라인은 97세의 나이로 애리조나 스코츠데일 자택에서 평화롭게 눈을 감았습니다.
에필로그: 신발 한 켤레의 의미
워싱턴 D.C.의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관에는 수천 켤레의 신발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방문객들은 그 신발들을 보며 숫자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거다의 이야기를 아는 사람들은 다른 것을 떠올립니다.
아버지의 마지막 충고, 그 신발을 끝까지 신고 걸어서 살아남은 소녀, 그리고 살아남아 반세기 동안 증오 대신 사랑을 가르친 한 여인의 발걸음.
"절대 신발을 벗지 마라."
그 한마디는 생존의 조언이 아니라, 삶을 향해 걸어가라는 아버지의 마지막 사랑이었습니다.
거다 바이스만 클라인은 미국 시민권자로서 50년 이상 미국에서 살았으며, 미국 사회에 가장 깊은 영향을 준 홀로코스트 생존자 중 한 명으로 기억됩니다. 그녀가 설립에 참여한 '거다와 커트 클라인 재단(Gerda and Kurt Klein Foundation)'은 오늘날에도 관용과 인권 교육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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