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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에 없는 길을 달린 여자 — 애니 런던데리, 자전거 한 대로 세계를 일주한 미국인
미국역사

지도에 없는 길을 달린 여자 — 애니 런던데리, 자전거 한 대로 세계를 일주한 미국인

1894년, 한 여성이 자전거 한 대와 빈 지갑으로 세계 일주에 나섰다. 그녀의 이름도, 나이도, 심지어 자전거를 탈 줄 아는지조차 출발 전날까지 불분명했다.

2026년 5월 13일3분 읽기

출발 전날 밤, 그녀는 자전거를 탈 줄 몰랐다

1894년 6월 25일 새벽, 보스턴 매사추세츠 주의회 의사당 앞에 한 여자가 자전거를 잡고 섰다. 기자들이 몰려들었고, 구경꾼들이 웅성거렸다. 그녀의 이름은 애니 런던데리(Annie Londonderry). 아니, 정확히는 그게 본명이 아니었다. 진짜 이름은 애니 코헨 코프초프스키, 리투아니아 출신 유대계 이민자의 딸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그녀는 출발 불과 며칠 전까지 자전거를 제대로 탄 적이 없었다.


내기 한 판이 역사를 만들었다

이야기는 보스턴의 두 신사가 나눈 한 가지 내기에서 시작됐다. 과연 여자도 자전거 한 대로 세계를 일주할 수 있을까? 당시 미국 사회는 여성이 자전거를 타는 것 자체를 불온하게 여겼다. "도덕적으로 해롭다", "여성의 몸에 맞지 않는다"는 말이 신문에 버젓이 실리던 시대였다.

지도에 없는 길을 달린 여자 — 애니 런던데리, 자전거 한 대로 세계를 일주한 미국인

내기의 조건은 단순했다. 15개월 안에 세계를 일주하고, 출발할 때 단돈 5달러만 갖고 떠날 것. 나머지 비용은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애니는 손을 들었다. 세 아이를 둔 스물넷의 가정주부가.

그녀는 출발 직전 한 가지 영리한 협상을 했다. 런던데리 리티아 스프링스 워터(Londonderry Lithia Spring Water) 회사로부터 100달러를 받고 자신의 자전거에 회사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그 날부터 자신의 이름도 "애니 런던데리"로 바꿨다. 미국 최초의 스포츠 스폰서십이라 불릴 만한 장면이었다.


거짓말과 용기 사이에서 달리다

애니의 여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처음엔 여성용 롱스커트를 입고 달렸지만, 시카고에 도착했을 때 과감히 남성용 바지로 갈아입었다. 사람들이 수군거렸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프랑스, 이집트, 인도, 중국, 일본을 거쳐 태평양을 건넌 뒤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왔고, 1895년 9월 23일 시카고에서 세계 일주를 공식 완료했다.

물론 그녀의 여정이 완전히 진실만은 아니었다. 일부 구간은 배와 기차로 이동했다. 스스로를 의사라고도, 하버드 법학대학원 졸업생이라고도 소개했다. 이야기는 갈수록 화려하게 불어났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흥미롭다.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쓴 여자였다. 거짓과 진실의 경계에서, 그녀가 진짜로 증명하고 싶었던 건 딱 하나였다. 여자도 할 수 있다.

귀국 후 애니는 《뉴욕 월드》에 자신의 여정을 기고하며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다. 여성 참정권 운동이 들불처럼 번지던 시대, 그녀의 자전거 바퀴 자국은 단순한 여행 기록이 아니라 이 나라에서 여자가 차지할 공간의 선언문이었다.


🎬 영화·드라마 속 이 역사

2022년 다큐멘터리 **《Spin: The Annie Londonderry Story》**는 애니의 삶을 추적하며 그녀의 기록 중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를 흥미롭게 파헤친다. 영화는 그녀를 영웅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과장과 허구가 섞인 자기 서사 그 자체가 19세기 여성이 살아남는 방식이었음을 차분히 보여준다.

라일리 킨의 2014년 영화 **《와일드》**는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을 혼자 종주하는 현대 여성의 이야기로, 애니의 정신적 계보를 잇는다고 평가받는다. 길 위에서 자신을 다시 발견한다는 서사는 시대를 가리지 않는다.


바퀴 두 개가 세상을 굴렸다

애니 런던데리가 달린 길은 지도에 없었다. 여자가 가도 되는 길이라고 누군가 그려준 적도 없었다. 그녀는 그냥 페달을 밟았다. 이름을 바꾸고, 스폰서를 구하고, 이야기를 지어내면서까지.

그 자전거 바퀴 소리는, 26년 뒤 미국 여성이 투표함에 손을 넣는 날까지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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