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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만 더, 주님, 한 명만 더 구하게 해주세요" — 총 한 자루 없이 75명을 구한 병사, 데즈먼드 도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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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만 더, 주님, 한 명만 더 구하게 해주세요" — 총 한 자루 없이 75명을 구한 병사, 데즈먼드 도스 이야기

1945년 오키나와 전투, 지옥 같은 절벽 위에서 총을 들기를 거부한 한 위생병이 12시간 동안 부상병 75명을 밧줄 하나로 내려보냈습니다. 그의 이름은 데즈먼드 도스, 미국 역사상 최초로 양심적 병역거부자로서 명예훈장을 받은 사람입니다.

2026년 4월 27일4분 읽기

총을 거부한 병사, 전쟁터의 천사가 되다

1. 버지니아 린치버그의 소년

1919년 2월 7일, 버지니아주 린치버그. 데즈먼드 토머스 도스(Desmond Thomas Doss)는 목수인 아버지 윌리엄과 어머니 버사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참전 후유증으로 알코올에 의존하던 아버지의 폭력적인 모습, 그리고 어느 날 삼촌과의 다툼에서 아버지가 권총을 들었던 순간은 어린 데즈먼드의 마음에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집 거실 벽에는 십계명이 적힌 액자가 걸려 있었습니다. 그중 "살인하지 말라"는 구절 옆에 카인이 아벨을 죽이는 삽화가 있었는데, 어린 데즈먼드는 그 그림 앞에 서서 스스로에게 맹세했습니다.

"나는 절대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사람이 되지 않겠다."

그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독실한 신자로 자라며, 안식일을 지키고, 무기를 들지 않겠다는 신앙적 확신을 키워갔습니다. 하지만 1941년 12월 7일, 진주만이 폭격당했을 때, 22살의 데즈먼드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조국을 위해 싸우고 싶었습니다 — 다만, 총을 들지 않는 방식으로.


2. "겁쟁이"라 불린 위생병

1942년 4월, 데즈먼드는 미 육군에 자원입대하며 "양심적 참전 협력자(conscientious cooperator)"로 등록했습니다. 그는 의무 보직, 즉 위생병(combat medic)을 자원했습니다. 그러나 군대는 그를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버지니아주 포트잭슨의 훈련소에서, 동료 병사들은 그를 **"겁쟁이"**라 불렀습니다. 사격 훈련을 거부하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밤마다 군화가 날아왔고, "전장에서 네가 우리를 죽게 만들 것"이라는 협박이 이어졌습니다. 상관들은 그를 정신 이상자로 전역시키려 했고, 심지어 군사재판에 회부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데즈먼드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비겁한 게 아닙니다. 저는 전쟁터에 나가겠습니다. 다만 생명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겠습니다."

결국 미 육군은 그의 요청을 수용했고, 그는 제77보병사단 307연대 1대대 B중대 소속 위생병으로 배치되었습니다. 총 한 자루 없이, 의료 가방과 성경책만 들고.


3. 지옥의 절벽, 핵소 리지

1945년 봄, 오키나와. 태평양 전쟁의 마지막 대규모 지상전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치열했던 곳이 마에다 절벽, 미군이 "핵소 리지(Hacksaw Ridge)"라 부른 높이 약 120미터의 수직 암벽이었습니다. 절벽 위에는 일본군이 동굴과 참호로 촘촘히 요새를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5월 5일, 토요일 새벽. B중대가 절벽 위로 올라가자마자 일본군의 집중 사격이 시작되었습니다. 미군 병사들은 쓰러졌고, 살아남은 자들은 절벽 아래로 후퇴했습니다. 그러나 단 한 사람이 절벽 위에 남았습니다.

데즈먼드 도스.

그는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을 기어 다니며, 쓰러진 병사들을 한 명 한 명 절벽 가장자리로 끌고 왔습니다. 밧줄로 만든 간이 들것에 부상병을 묶고, 35미터 아래로 한 명씩 내려보냈습니다. 일본군 저격수의 총탄이 머리 위를 스쳤고, 수류탄 파편이 주변에 떨어졌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12시간. 밤이 올 때까지 그는 혼자서 이 일을 반복했습니다. 한 명을 내려보낼 때마다 그는 기도했습니다:

"주님, 한 명만 더. 한 명만 더 구하게 해주세요(Lord, please let me get one more)."

공식 기록에는 50명으로 되어 있지만, 부대원들의 증언을 종합해 미 육군은 75명이라는 숫자를 최종 인정했습니다. 총 한 발 쏘지 않은 사람이, 한 번의 전투에서 75명의 생명을 구한 것입니다.


4. 그 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데즈먼드의 영웅적 행동은 그날 하루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후 전투에서도 그는 최전선에 남아 부상병을 치료하고 후송했습니다. 5월 21일, 그는 마침내 일본군의 수류탄 파편과 저격수의 총탄에 맞아 심각한 부상을 입었습니다. 팔, 다리, 그리고 온몸에 파편이 박혔습니다.

놀라운 것은, 들것에 실려가던 중에도 자기보다 상태가 심각한 병사를 발견하자 들것에서 굴러 내려와 그 병사에게 자리를 양보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부상당한 채 기어가다가 또 다른 저격수의 총탄에 팔이 관통당했는데, 소총 개머리판으로 직접 부목을 만들어 묶고 300미터를 혼자 기어서 아군 진지에 도착했습니다.


5. "겁쟁이"에서 명예훈장 수훈자로

1945년 10월 12일,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백악관 잔디밭에서 데즈먼드 도스의 가슴에 **미국 최고의 군사 훈장인 명예훈장(Medal of Honor)**을 달아주었습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로서는 미국 역사상 최초였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대통령에게서 받는 이 훈장보다, 당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용기를 더 부러워합니다."

한때 그를 괴롭히고, 겁쟁이라 조롱하던 동료 병사들은 전쟁이 끝난 후 하나같이 증언했습니다:

"도스가 절벽 위에 남아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는 비로소 다시 올라갈 용기를 얻었습니다."


6. 조용한 영웅의 마지막 날들

전쟁 후유증으로 데즈먼드는 결핵을 앓았고, 한쪽 폐를 잃었으며, 청력도 크게 손상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조지아주의 작은 농장에서 아내 프랜시스와 조용히 살며, 교회와 지역사회에서 봉사하는 삶을 이어갔습니다.

2006년 3월 23일, 데즈먼드 도스는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테네시주 채터누가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2016년, 멜 깁슨 감독의 영화 **《핵소 고지(Hacksaw Ridge)》**가 개봉되며 그의 이야기가 전 세계에 알려졌습니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한결같이 물었습니다: "이게 정말 실화인가요?" 실화였습니다. 아니, 실제 이야기는 영화보다 더 극적이었습니다.


한 문장의 기도가 남긴 것

데즈먼드 도스는 증명했습니다. 진정한 용기는 총을 드는 것이 아니라, 폭력 앞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밧줄 하나, 기도 한 마디로 75명의 생명을 건져 올린 이 위생병의 이야기는,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도 인간의 선함이 얼마나 강력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한 명만 더, 한 명만 더."

그의 기도는 75번 응답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75명의 생명은, 다시 수천, 수만 개의 삶으로 이어졌습니다. 오늘도 그 이어진 삶들이 어딘가에서 숨 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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