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런던의 충격 — 조지 3세가 렉싱턴 소식을 들었을 때 (1775년 5월)
렉싱턴 전투 소식이 대서양을 건너 런던에 도착합니다. 조지 3세의 분노, 의회의 분열, 그리고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들어선 양쪽의 이야기.
6주간의 침묵
1775년에는 인터넷도 전보도 없었습니다. 대서양을 건너는 가장 빠른 방법은 범선이었고, 좋은 바람을 만나도 6주가 걸렸습니다. 4월 19일 렉싱턴에서 울린 총성이 런던에 도착한 것은 5월 말에서 6월 초 사이였습니다.
6주 동안 런던은 아무것도 모른 채 평소처럼 돌아갔습니다. 의회는 식민지의 반발이 곧 수그러들 것이라 믿고 있었고, 조지 3세도 차 한 잔을 줄이면 해결될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6주 사이에 타이컨더로가가 함락되고 크라운포인트가 점령되었지만, 런던은 아직 렉싱턴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왕의 분노
소식이 도착했을 때 조지 3세의 반응은 명확했습니다. 분노. 그는 식민지인들을 반역자로 규정했고, 무력으로 진압해야 한다고 확신했습니다. 수상 노스 경도 같은 입장이었습니다. 왕과 수상은 양보란 약함의 표시이며, 한 식민지의 반항을 허용하면 제국 전체가 흔들린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왕궁 밖의 반응은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경고했던 사람들
영국 의회에는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에드먼드 버크는 식민지와 화해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논리는 현실적이었습니다. 대서양 건너 3,000마일 떨어진 곳에서 전쟁을 치르는 것은 비용이 천문학적이며, 이길 수 있다 해도 파괴된 식민지에서 무엇을 얻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전쟁 영웅 윌리엄 피트도 비슷한 경고를 했습니다. 식민지인들은 영국인의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지 독립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며, 지금 대화하면 제국을 지킬 수 있지만 무력을 쓰면 영원히 잃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이 경고들은 무시되었습니다.
게이지의 편지, 그리고 현실
게이지 장군의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2만 명의 증원군을 요청하는 내용이었습니다. 현재 병력 6,500명으로는 보스턴조차 지킬 수 없다는 절박한 보고였습니다.
런던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식민지의 "소란"이 게이지 같은 노련한 장군이 2만 명을 요청할 정도라니. 그러나 2만 명을 모집하고 훈련시키고 배에 태워 대서양을 건너 보내려면 몇 달이 걸립니다. 그 사이 5월 12일에는 크라운포인트도 식민지군에게 넘어갔습니다.
돌아올 수 없는 길
필라델피아에서는 대륙회의가 민병대를 공식적으로 관할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총사령관이 임명되지는 않았지만, 버지니아 출신의 조지 워싱턴이 가장 유력한 후보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습니다. 남부 출신 장군을 임명함으로써 이 전쟁이 뉴잉글랜드만의 일이 아니라 대륙 전체의 일임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양쪽 모두 돌아올 수 없는 지점을 넘고 있었습니다. 런던은 군대를 보내기로 했고, 필라델피아는 군대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대화의 창은 빠르게 닫히고 있었고, 그 사이 대서양의 파도는 여전히 6주짜리 거리를 유지한 채 양쪽의 결정을 서로에게 전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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